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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 Midsommar, 2019 - 아직 중천에 있는 태양, 이리하여 이 영화에 대한 내 소견의 정리는 언제쯤 끝이 날지...카테고리 없음 2020. 3. 18.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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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년, 7년에 나온 영화 <유전>은 거의 유명한 이름을 찾을 수 없었어요.그래도 홍보에서는 국내 한정으로 유명한 번역가 황석희가 무섭고 혼났다는 댓글과 로튼 토마토 하나 00%가 전부였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국내 개봉일이 북미와는 조금 동시에 개봉해 더 놀랍습니다. "결과물을 통해 이야기를 쓴다면, 국내에선 1인당 78,290명을 북미에선 약 4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등, 데뷔작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는 흥행과 반응을 낳았습니다" 저도 같은 극장에서 놓쳐 봤는데 깜짝 놀랄 영화가 아니라 깜짝 놀랐고 무엇보다 영화가 끝났지만 여전히 섬뜩한 느낌이 남았어요. 그래서, 섣불리 2차 관람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영화 <유전>은 좋았습니다. 이렇게 잘 만들어 주니 자연스레 그의 차기작 미드소마에 관심이 생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북미와 국내 반응은 싸늘합니다. 국내 개봉 5일째를 맞은 누적관객 수는 52, 1,79명(07, 1, 5) 기준으로 전작들이 보인 반응을 소견하면 아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저의 소견은 <유전>때의 소견댁에서였습니다. 여전히, 재수 없어 긴장하며 좋아서 뭔가 변태적인 소견 같은 참 오묘한 느낌으로 역시 젖어 있습니다. 어떤 영화였기에 이런 느낌을 주었는지 영화 미드소마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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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왠지 공포에 떠는 '대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생과의 대화 중에 문자가 오지 않아 집에 소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남자 칭구인 크리스티안에게 도움을 청하는데요. 하지만 이런 불안감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결국, 1어 본인으로는 안되는 1들이 1어 본인이고 "대니"는 정신적으로 피폐합니다. 크리스티안이라고 칭구는 이런 대니의 마음을 다시 한번 벗기 위해 스웨덴에서의 하지절에 함께 갈 것을 제안합니다. 가기 싫었지만 대니는 못 이기는 척 그들과 촌락에 도착해요. 모든 것이 순조로웠던 당시 촌락은 하지절의 첫 단계인 벼랑을 선보이고 이를 목격한 대니와 칭구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리는데.
보통 영화 러닝타임은 120분. 야구로 말하자면 정규 이닝 9회를 의미하고, 축구로 말하면 전후반 90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공포영화'에 평균을 바라기는 어려워요. 다른 이유가 있지만 대다수 공포영화가 많이 사용하는 점프스케어, 즉 깜짝은 정음을 사용하는 시작엔 그 효과가 최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는 효과가 기하급수적으로 줄고 피로감을 느끼게 하면 대다수 공포영화가 90분을 기준으로 하는데요. 이런 영화 사이에 등장한 알리에스터의 공포는 매우 특별합니다. 전작 유전은 127분에서 7분의 추가 시간을 받고, 이번 미드소마는 147분으로 추가 시간을 넘긴 연장전까지 진행되는데, 이처럼 '알리에스터'는 '깜짝'이라는 비결보다는 '어색함'이라는 긴 비결을 사용합니다. 전작 유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미드소마에서도 이 비결은 관객들에게 유용하게 받아들여집니다. '깜짝'이라는 비결이 순간적인 힘을 발휘하는 비결이라면, '渋'은 순간적인 힘은 없지만 언제든지 놀래키는 데 부자연스럽지 않게 당위성을 설립하는 겁니다. 깜짝은 연출자의 철저한 결의에 맞춰지는 비결이지만, 감칠맛은 관객의 감정에서 직접 터져 나오므로 연출자 입장에서는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풀 만큼 힘이 부족해 좋은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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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좋은비결이라면관객의입장에있는의견이괜찮았다면왜안썼지?라는질문이자동으로튀어나와자신감을갖게될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작비 문제도 있겠지만 집중력 문제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흔히 어른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20분으로 책정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공포영화의 한계는 90분입니다. 이는 대다수 공포들이 사용하는 '점프스케어', 즉 '깜짝'의 한계입니다. 점프스케어가 이 내용의 연결성보다는 관객을 놀라게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깜짝 놀랄지 몰라도 두려움이 남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 미드소마는 앞서 말했듯이 점프스케어보다는 내용을 차근차근 쌓아갑니다. 이걸 보면 영화는 한 순간보다는 길게 남기는 선택을 한 것 같아요. 그랬더니 신, 앞서 말했듯이 영화가 길어서 땅속 관객은 집중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영화 <미드소마>도 '깜짝'이라는 비결을 써요. 앞에서 말한 것을 보면 '깜짝'은 좋지 않은 것을 비추는데,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깜짝'은 약이되는거죠. 그동안깜짝을싫어했던것은내용적으로연결이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 야구에서 스토리라고 하면 투구수만 무의미하게 늘 그랬던 것처럼 말해요. 하지만 <미드소마>는 이미 관객이 연출자의 수고를 덜어주면서까지 스스로 갑갑하게 앉아 있으니, 이 정세에서 보여주는 '깜짝'은 '위닝샷'으로 자신을 타자 자신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 내용으로 언급한 절벽이 자신의 경전을 사진에 담다가 들킨 장면인데, 이렇다 할 행동은 아니지만 지루해진 관객들에게는 몸도 움직일 수 있어 여러모로 좋은 비결로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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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점프스케어는 이런 방식으로 쓰입니다.라고장면을하나로바꿔줍니다. 스토리적으로는 하나의 마침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동안 정리도 하면서 길어진 스토리에 지친 관객에게는 휴식을 취하는 장치니까요. 이렇게 이 영화에서 점프스케어 때문에 피곤하지 않아요.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영화의 줄거리입니다. 전작에서는 가족과 미니어처로 공포 분위기와 결합된 스토리가 이번에는 흔한 대학 공포물로 바뀌었습니다. 예를 들어 호스텔처럼 갇혀버린 젊은 청춘남녀라는 거죠. 물론, 스토리가 눈에 보인다고 이 영화를 파헤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이 영화 미드소마가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 것을 관객에게 공개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 <미드소마>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먹서먹하다는 게 이 영화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내가 이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어렵죠. 루벤이라는 캐릭터는 영화에서 맥거핀인지, 아니면 제가 보지 않은지, 저 장면은 어떤 장면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워요. 이 영화의 주인공 대니처럼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나도 불안해요. 그래도 제가 생각한 대로 정리하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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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지막을 보면 대니는 희미하게 웃으며 영화를 마무리하고 있어요.옆 sound의 뜻이 뭔지 제일 궁금했어요. 잠시 영화를 앞으로 돌리면 "대니"의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스토리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안 좋은 일을 겪으면서 그녀는 크리스티안에 기대는데요. 이런 대니와 달리 크리스티안은 그녀와 헤어지자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결국 스웨덴 여행을 떠나지만 영화는 여기서 대니만 고립됐습니다. 성비에서도 과인타과이지만 '버섯차'와 '대마'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니'가 단독 '버섯차'를 선택하는 장면처럼 고립된 인상을 계속 줍니다. 다음 영화는 절벽 장면에서 그들을 대변해 보이겠어요. 소 sound를 치는 인물은 현재의 "대니", 이렇게 그에게 다가가는 캐릭터는 남성의 칭구 "크리스티안"이라고 칭구로 가리켜, 아픔도 몰라주는 무정함을 대변시킵니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에 대니가 5월의 여왕으로 올라가는 장면에서는 거꾸로 크리스티안이 고립됩니다. 이것은 옷의 색깔로 나타내지만, "크리스티안"을 제외하고 "대니"를 포함한 마을의 모드가 흰 옷을 입습니다. 그것을 통해 웃는 "대니"의 표정은, 앞에 쓴 과자의 아픔을 "크리스티안"에게 전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이렇게 상처때문에 웃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 내용고도 "믿는 sound"라고 하는 실현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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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대니는 5월의 여왕이 되고, 이 과정에서 춤이라는 과정을 보여줍니다.대개 매체에서 "춤"은 서로의 발을 밟지 않는 것으로 본인이 옵니다. 그만큼 본인보다는 남을 소견하고 서로의 소견을 맺는 연인에게 매칭되는 행동으로 쓰입니다. 즉, 대니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 신뢰가 있어 보입니다. 비록 외지에서 온 그녀지만 춤추는 동안 대니는 동네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고 믿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소견이 외근하는 원의 크기처럼 커졌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픈 본인을 내쫓기 바쁜 크리스티안과 오히려 본인의 아픔을 지지해 줄 동네 사람들이 본인의 시야 안에 있다면 누구나 후자를 택하지 않을까요. 이처럼 영화 미드소마는 명확하게 본인이 나눌 수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내 해석이 예기해도 다른 가능성은 열려 있는 영화이고, 무엇보다 내가 대니가 아니어서 왜 웃었느냐는 의문에 영원히 이 의문은 중천에 뜬 태양처럼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보다 이 영화의 베드신이 더 강렬하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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